"하느님께서 주신 것, 그분 뜻대로 쓰는 게 가장 바람직"

 


육신의 허기를 채울 수 있는 한 조각의 빵만큼 소중한 게 있다. 빈곤의 늪에서 신음하는 이들에게 희망의 빛을 전하는 일이다.
필리핀 세부 파실(Pasil) 빈민촌 아이들에게 이국땅의 할머니가 '희망'을 선물했다. 아이들이 쾌적한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는 교실 8개다. 밥 한 끼 배불리 먹기 어려운 가난 속에서, 혼잡하고 비위생적인 빈민촌 골목이 세상의 전부인 아이들에게 새 교실은 더 나은 미래가 있음을 알리는 선물이 됐다.
파실 초등학교 교실 증축사업을 후원한 김경숙(요안나, 86) 할머니와 동행해 새 교실이 생긴 아이들의 기쁨과 파실 빈민촌의 모습을 소개한다.

 


# 이국땅에 전해진 새로운 희망
 
1월 30일 필리핀 세부 파실 초등학교. 김경숙 할머니 일행을 태운 승합차가 교정에 들어서자 학생들이 손에 쥔 태극기를 흔든다. 김 할머니를 반기는 아이들 얼굴에 감사와 기쁨의 표정이 역력하다. 부모에게 간절히 원하던 선물을 받은 자녀의 눈빛이다.
스와레즈(12)양은 "전교생 2400명이 모두 새 교실에 들어가 공부하고 싶어할 만큼 부러워한다"며 새 교실이 생긴 것을 기뻐했다. 베르타다스(12)군은 "이 지역에서 가장 좋은 교실을 갖게 됐다"며 "다른 학교 친구를 만나면 새 교실을 꼭 자랑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곳 학생 대부분은 빈민지역 출신이다. 학교 밖 빈민촌에는 아이들이 뛰어 놀 공터조차 없다. 게딱지처럼 붙은 집들이 해를 가려서 집안과 골목에는 대낮에도 햇볕이 들지 않는다. 그러기에 아이들에게 뛰어놀고 공부하는 학교 의미는 남다르다. 

 

아이들 환호에 답하는 김 할머니 머리 속에는 만감이 교차한다. 이북이 고향인 김 할머니는 6ㆍ25 전쟁 직전 월남했다. 낯선 남녘 땅 판자촌에서 삯바느질을 하며 가난에 시달렸다. 성실함을 밑천 삼아 '짠순이' 소리를 들어가며 동대문에서 포목점을 운영했다. 누구보다 근면했기에 사업은 날로 커졌다.

 

김 할머니는 방에 불을 지피지 못해 자녀들 발에 동상이 걸릴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던 시절을 잊지 않았다. 김 할머니는 사업이 안정되자 필요로 하는 곳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만큼 기부를 시작했다. 김 할머니가 교회 내 수 많은 단체와 성전 건축사업에 기부한 액수는 추산하기 힘들 정도다.


 

우연한 기회였다. 텔레비전에서 빈곤으로 신음하는 외국 아이들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고생스럽던 과거가 떠올라서일까, 할머니는 해외원조를 결심했다. 오랜전부터 인연이 있던 한국희망재단 최기식 신부(원주교구 천사들의 집 원장)한테서 빈민지역 초등학교 증축사업에 대한 설명을 듣고 5억 원을 기부했다. 그 기부는 묵상과 기도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가족의 한달 평균 벌이가 한국 돈 6만 원이 채 되지 않는 파실 빈민촌에서 최신식 건물은 시 전체의 모범사례가 됐다.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을 학생들에게 심어주는 '사건'이었다. 몰상식한 유학생이나 관광객 등으로 한국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은 지역 상황에서 할머니의 선행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 김경숙 할머니의 기부로 지어진 파실초등학교 요안나홀.

 


주변의 감사에도 김 할머니는 "(지어진 건물이) 빨간 벽돌교실이 아니라서 너무 아쉽다"고 말했다. 6ㆍ25 전쟁 직전,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남으로 내려온 소녀가 꿈꾸었던 상상 속 학교와는 좀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빨간 벽돌로 짓든, 회색 벽돌로 짓든 선생이 열심히 가르치고, 아이들이 성실하게 따라 배우면 좋은 학교"라고 말했다. 2층으로 된 최신식 건물은 할머니의 세례명을 따 요안나홀이라고 이름 지었다.


파실초등학교 마이크 라마 교장은 "교실이 부족해 오전 오후반으로 나눠 수업을 하는 현실에 요안나홀이 생긴 것은 축복이다"며 "학생들 중심으로 설계된 요안나홀이 앞으로 공립학교 교실의 새로운 모범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 할머니는 축하식에서 "어렵게 벌었지만 그 돈은 모두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그분 뜻대로 쓰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며 "열심히 배워서 어른이 되면 어려운 이웃을 도우면서 살라"고 학생들에게 당부했다.


 
# 파실 바랑가이 아이들의 미래

 

파실초등학교가 있는 파실 지역을 색에 비유하면 검은색이다. 한 가구당 자녀 수는 5~6명이다. 하루 벌어 하루 살기도 버겁다. 가톨릭국가라 인위적 산아조절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아이들 영양상태가 워낙 부실해 피드 더 칠드런(Feed the Children)이라는 현지 단체가 영양죽 공급 사업을 펼치는 게 현실이다.

 

파실에서 차로 30분만 가도 이곳 주민은 상상하기 힘든 천국 같은 휴양지가 펼쳐진다. 관광객에게는 그림 같은 야자수 잎이 이곳 주민들에게는 생계 수단이 되기도 한다. 여자들은 야자수 잎으로 바구니를 짜서 관광객에게 팔고, 남자들은 트라이시캇(자전거로 끄는 교통수단)을 끌어 돈을 번다. 그나마 일자리가 없는 주민은 마약과 도박에 빠져 헤어나지 못한다.


 

▲ 빈민촌 아이들이 창 밖을 내다보며 웃음짓고 있다. 교육만이 아이들의 밝은 미래를 지킬 수 있다.

 


이 암울한 지역의 하나뿐인 희망은 교육이다. 야자잎으로 쌀을 포장하며 생계를 잇는 페르사씨는 "종일 일하면 270페소(한화 7천 원)를 번다"며 "어려운 살림이지만 더 나은 미래를 열어주기 위해 아이를 학교에 보낸다"고 말했다. 페르사씨의 딸 세부릴스(12) 양은 커서 기술자가 되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아이들이 꿈꾸는 미래는 파실초등학교가 있기에 가능하다. 학교는 낮에는 초등학생이, 밤에는 12~20살 청소년 648명이 공부하는 공간이다. 야간반 학생들은 낮에 어시장 등에서 일하고 저녁에 학업을 이어가며 꿈을 키운다. 김 할머니가 기증한 새 교실 덕분에 오전 오후반으로 나눠야 했던 수업방식은 사라지게 됐다. 세부릴스 양 같은 아이들이 더 많은 시간을 학교에서 지낼 수 있게 됐다.

 

한국희망재단 이철순 상임이사는 "먹는 거 한 개 더 주는 것보다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주는 사업이 중요하다"며 "이번 교실 건축은 빈민촌에 희망을 안겨준 사업"이라고 평가했다.
 이 상임이사는 "아이들이 기뻐하는 모습에 보니 눈물이 난다"며 "앞으로 현지 단체와 함께 펼치는 사업에 지역민의 참여를 유도해 주인의식을 끌어내는 데 주력하겠다"고 말했다.

 

 세부(필리핀)=백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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